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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등 위의 춤>


Written by Younghee Kim


해마다 5월이면 음악제가 열리는 아름다운 도시에 한 소녀와 아버지가 살고 있었어요.

소녀는 음악을 너무나 좋아해서 항상 노래를 흥얼거렸고 그러다 흥에 겨우면 춤을 추기도 했어요.

봄이 오고 도시가 음악제 준비로 들썩이면 소녀는 하루 온종일 가만있지 못하고 작은 새처럼 지저귀었답니다.

 

하지만 소녀의 아버지는 음악을 들을 수가 없었어요.

젊은 시절 원인 모를 병을 앓은 이후 세상의 소리들이 점점 더 멀어지더니, 결국 아주 작은 소리조차 들을 수 없게 되어버렸어요. 서서히 소리가 희미해져갔기에 들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만, 딸의 여린 숨소리와 맑은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는 사실에 그는 아무도 몰래 눈물짓곤 했어요.

 

소녀가 아주 어려 말을 잘하지 못했을 땐 아버지와 눈빛만 마주쳐도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어요. 둘 사이에는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음계와 바람만이 공기의 요정처럼 떠다녔고 복잡한 글자 따위는 필요 없었지요.

 

그러다 소녀가 자라고 노래보다 말을 더 잘하게 됐을 때, 소녀는 귀가 들리지 않는 아버지가 점점 더 원망스러워졌어요.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질수록,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할수록, 아버지의 사랑이 점점 더 많이 간절할수록 더 그랬어요. 그래서 언젠가부터 소녀는 아버지의 소리를 외면하기 시작했어요. 아버지의 눈빛이 건네는 소리. 아버지의 표정이 건네는 소리. 아버지의 심장이 건네는 소리를요.

 

음악제에 나가고 싶었던 소녀는 아직 어려서 아버지의 보호자로서의 도움이 간절했지만, 나이 들고 귀도 안 들리는 아버지가 부끄러웠어요. 너무 오래 바라보지 않았던 아버지의 눈을 들여다보며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 것도 힘들게만 느껴졌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어요.

화려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분명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올 음악당 앞을 배회하고 서성이는 딸의 모습을 여러 번 지켜봤기 때문이었어요. 음악당을 바라보는 딸의 간절한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었어요.

 

어느 밤,

혼자 울고 있는 소녀에게 아버지가 왜 울고 있느냐고 물어봤어요.

아무리 여러 번 안타깝게 이유를 물어도 소녀는 고개만 저을 뿐이었어요.

아버지의 눈빛은 안쓰러움과 애잔함으로 젖어 있었지만 소녀는 아버지의 눈빛을 외면한 채 발끝만 내려다보았어요.

 

그때 어디선가 어린 여자아이의 노랫소리가 들려왔어요.

소녀는 낯설지 않은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노랫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봤어요.

 

소녀가 바라본 그곳에는 오래된 녹음기가 재생되고 있었고, 아버지가 그 앞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어요. 마치 그 노랫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요.

 

그것은 소녀가 아주 어릴 때, 세상의 모든 노래들을 자기 것인 양 의기양양하게 불러대던 시절에 아버지가 녹음해둔 것이었어요. 녹음기 속 꼬마 소녀의 목소리는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 차 스피커를 뚫고 나올 듯 낭랑하고 활기찼어요.

 

소녀는 그제야 아버지의 눈동자를 바라봤어요. 아버지의 눈빛이 소녀를 따스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고, 아버지의 두 팔은 소녀를 기다리는 듯 열려 있었어요.

 

소녀는 아주 작은 꼬마였을 때로 돌아가 아버지의 발등 위로 올라갔어요. 음악이 흘러나오면 아버지가 자신의 발등 위에 소녀의 두 발을 올라서게 하고서 함께 춤추던, 아주아주 어릴 적으로 돌아갔던 거예요.

 

예전엔 아버지의 무릎과 허리 언저리에 머물렀던 소녀의 키가 자라 이제 아버지의 심장 가까이 귀가 닿았고, 음악에 맞춰 발을 옮기고 있다고 느꼈던 둘의 춤이 실은 아버지의 심장 소리에 맞춰 움직이고 있음을 알게 됐어요.

아니 녹음기 속에서 흘러나오는 소녀의 노래가 아버지의 심장 박동과 하나라는 걸 깨닫게 됐어요.

 

아버지는 심장 속에서 한 번도 소녀의 노래를 멈춘 적이 없었고, 발등 위에서 한 번도 소녀의 발을 내려놓은 적이 없단 사실도 알게 됐어요. 아버지와 소녀는 원래 그렇게 하나였던 그 순간으로, 말과 글이 필요 없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오래오래 함께 춤을 추었어요.

 

맞대고 있는 심장과 귀가, 서로를 지지하며 한발 한발 내딛는 발이, 그 후로 다가올 어떤 시간의 모래 위에도 흩어지지 않고 또렷하게 각인되어 서로의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아버지와 소녀는 기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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